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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마즈 나리아키라 島津斉彬 본문
1809.4.28~1858.8.24
사쓰마번 28대 번주(1851~1858)


가마쿠라 시대부터 에도 시대까지, 700년이라는 긴 세월에 걸친 시마즈 가문의 번영. 그 역사는 분지 원년(1184년), 고레무네 타다히사가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로부터 남큐슈에 펼쳐진 일본 최대의 장원인 '시마즈 장원'의 관리직(하사직 및 지두직)을 명받아 '시마즈'를 성으로 삼은 것에서 시작됩니다.
이후 시마즈 가문은 남북조 시대의 혼란을 극복하고, 슈고 다이묘에서 전국시대를 거쳐 근세 다이묘로 발전했습니다. 그리고 류큐 왕국을 포함한 72만 석의 거대 번(藩)이 되어, 도자마 다이묘(외곽 영주)로서 막중한 위치를 차지한 시마즈 가문의 계보. 그것은 그대로 면면히 이어지는 사츠마의 역사를 이야기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시마즈 번 역대 영주 중에서도 유례를 찾기 힘든 선견지명으로 알려진 인물이 제28대 나리아키라 공입니다. '난벽 다이묘(서양 문물에 심취한 영주)'라 불렸던 증조부 시게히데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세계 정세에 정통했던 나리아키라는, 서구 열강과 대등한 기술 문화를 가진 근대 국가 일본으로의 변모를 열망했습니다.
강하고 풍요로운 일본. 그런 미래를 목표로 나리아키라가 일으킨 수많은 위대한 사업들. 그중 하나가 바로 '사츠마 키리코'였습니다. 근대 여명기로 향하던 시대에 홀연히 반짝였던, 샛별과도 같은 빛. 그것은 나리아키라라는 존재 없이는 태어날 수 없었을, 희귀한 전통의 시작이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쇼군 이에나리의 장인인 증조부 시게히데의 지도를 받은 나리아키라.
시게히데와 함께 시볼트(Siebold, 독일인 의사이자 박물학자)를 만나고, 그 제자인 도츠카 세이카이, 다카노 조에이 등 당대 일류 난학자(네덜란드 학문을 연구하는 학자)들과 교류를 가졌던 나리아키라는, 스스로 난학을 배우고 로마자로 편지나 일기를 쓰는 등 국제적 식견이 높은 인물이었습니다.
아편전쟁과 위기감
때마침 1840년, 아편전쟁 발발. 동양 최대 최강인 중국(청나라)을 서양의 섬나라 영국이 무너뜨렸다는 위협은, 페리 내항보다 한발 앞서 일본의 지식인들을 전율하게 했습니다. 근대 무기로 결집된 서구 열강의 강대한 군사력. 나리아키라도 이 사태를 심각하게 본 한 사람이었습니다.
세계 문화와 정세에 정통했던 만큼 아편전쟁 후의 정세를 심각하게 받아들여, 서구 과학 기술의 도입, 군비와 산업 및 제반 제도(여러 제도)의 근대화를 시급히 꾀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 시각은 번(사츠마 지역)의 틀을 넘어 일본 전체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나리아키라는 (가문 내 다툼으로 인한) 불우했던 시절에도 많은 난학자들과 교류하며 정보를 수집하고, 다가올 새로운 시대를 위해 착실히 대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가에이 4년(1851년), 나리아키라는 43세의 나이로 사츠마 번의 영주직을 승계했습니다. 그의 정책은 다방면에 걸쳐 있었지만, 그중 으뜸은 바로 '슈세이칸(集成館) 사업'이었습니다.
영주가 되자마자 대포 주조를 위한 반사로(금속을 녹이는 용광로의 일종) 실험에 착수하고, 서양식 선박의 건조를 명했습니다. 이듬해, 이소 별저(현재의 센간엔) 인근에 반사로 조성을 시작했습니다. 아낌없는 투자와 5년이라는 세월을 들여 반사로 2기 4로(二基四窯)의 조성을 성공시켰습니다. 이는 일본에서는 사가 번(佐賀藩)에 이은 쾌거였습니다.
의지할 것이라고는 몇 권의 책뿐, 온갖 난관에 위축되려는 관계자들을 "서양인도 사람이고, 사가 사람도 사람이며, 사츠마 사람 또한 사람이다. 물러서지 말고 더욱 연구하라"라고 격려하며 성공으로 이끈 사람, 그가 바로 총명하기로 명망 높았던 나리아키라였습니다.
나리아키라는 반사로 주변에 용광로, 찬개대(포신에 구멍을 뚫는 기계), 유리 제조소, 대장간, 증기 기계 세공소, 가마솥 제조소 등의 공장을 차례로 세우고 '슈세이칸'이라 명명했습니다. 나아가 서양식 선박 건조, 증기 기관 제조, 방적 등 가고시마 각지에서 다채로운 사업을 전개했습니다. 이는 당시 일본은 물론 중국, 조선에도 존재하지 않았던 최신 근대 과학 기술 시설이었으며, 공업 대국 일본의 원점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슈세이칸의 꽃, 사츠마 키리코의 탄생
나리아키라의 슈세이칸 사업 중에서도 유난히 화려한 빛을 발하는 것이 바로 '사츠마 키리코'입니다.
사츠마의 유리 제조는 27대 영주 나리오키 시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고카 3년(1846년), 제약관에서 약품을 제조할 때 약품을 담을 유리 용기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에도(도쿄)에서는 이미 가가야, 가즈사야 같은 유리 도매상이 활기를 띠고 있었는데, 나리오키는 가가야의 제자 야모토 카메지로를 초빙하여 제약관 근처에 유리 제조소를 만들고 유리 용기 제조에 착수하게 했습니다.
그 후, 나리아키라는 번 내의 난학자(서양 학자)들과 상의하며 '홍색(붉은) 유리'의 연구를 명했습니다. 고도의 기술을 요하는 홍색 유리의 제조는 수백 번의 실험을 거쳤다고 전해지며, 마침내 구리 분말을 써서 붉은색을 내는 '동(구리) 홍색 유리'와 황금을 써서 투명한 루비 레드 빛을 내는 '금(골드) 홍색 유리'의 창제에 성공했습니다. 에도 시대에 이 홍색 유리를 제조할 수 있었던 곳은 오직 사츠마 번뿐이었기에, '사츠마의 붉은 유리(사츠마의 홍비드로)'라 불리며 매우 귀하게 여겨졌다고 합니다.
안세이 2년(1855년)에는 이소(후의 슈세이칸)에도 유리 공방을 설치하여, 슈세이칸 사업의 일환으로 본격적인 사츠마 키리코를 비롯한 일상용 크리스털 유리와 판유리 제조를 시작했습니다. 민간 레벨이 아닌 번(국가)의 사업으로 운영된 이 유리 공장은 동 홍색 유리 가마 2기, 금 홍색 유리 가마 2기, 크리스털 유리 가마 1기 등 엄청난 규모를 자랑했습니다. 나리아키라의 열의와 급진하는 기술로 나가사키나 에도 등 선진지의 기술 수준을 뛰어넘을 만큼 급성장한 사츠마 키리코. 그 아름다움과 완성도는 타지역의 추종을 불허했을 뿐만 아니라, 기술의 원류였던 영국, 보헤미아, 중국마저 능가하고 있었습니다.